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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과 이순신 본문

뉴스브리핑

영화 명량과 이순신

DinoKim 2014. 8. 5. 09:55

영화 명량을 봤다.


김훈의 칼의노래에서 읽었던 이순신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최민식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이순신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여하간 영화를 보고 나서 든 첫번째 의문은 울돌목에서 쇠사슬로 왜군을 격파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왜 그 장면이 없나 했다.


검색을 해보니, 쇠사슬로 왜군을 격파했다는 설은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한다.


위키백과에는 아래와 같이 철쇄가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B%AA%85%EB%9F%89_%ED%95%B4%EC%A0%84


철쇄 사용설 및 명량해전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논란

일설에 의하면 이순신이 철쇄(쇠사슬)를 전투에 사용했다고 하나 신빙성이 희박하다. 그 예로, 《KBS 역사스페셜팀》은 철쇄를 사용한 명량 해전을 재현한 바 있다.

수중 철쇄(쇠사슬)는 지금 진도대교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걸었다. 양쪽에 막개를 박아놓고 쇠줄은 물 속에 잠기게 숨겨놓은 뒤 왜수군을 기다리는 것이다. 1597년 음력 9월 16일 오전 11시경, 어란진에서 출발한 333척의 일본 수군은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에 들어선다. 그들이 울돌목에 들어서자 수중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혀 여지없어 부서진다.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춘다. 일본 수군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가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의 함선들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처럼 퍼붓는다.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왜수군 쪽으로 흐른다. 유리하던 조류마저 불리하게 변하자 조선 수군이 떠내려가는 일본 수군을 완전히 섬멸한다.

그러나 명량 해전의 전투 위치와 철쇄 사용 문제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다음은 해군사관학교 해전사 담당 이민웅 교수(해군 중령)의 주장이다.

먼저 전투 위치는 명량해협(울돌목)이 아니라 해협을 통과한 뒤 해남군을 따라 우측으로 구부러진 지점인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 앞바다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난중일기》 음력 9월 16일자를 제시한다. 그 부분을 보면 “왜 함대의 접근 보고를 받고 전투 준비를 마친 뒤 바다로 나갔는데 곧바로 왜선 133척이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라고 되어 있다. 명량해협(울돌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이라는 것이 이민웅 교수의 주장이다. 또, 명량에서 쇠사슬을 설치해 왜선을 격퇴했다는 설명에 대해서도 후대 영웅담이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화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전라좌수영 앞에 방어용 쇠사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명량 해전에서 쇠사슬은 물살이 세서 걸 수가 없었으므로 사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쇠사슬은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에 “철쇄(鐵鎖) 즉 쇠사슬과 철구(鐵鉤)로 적선을 깨뜨렸다.”란 기록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기록은 과장이 많아,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철쇄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근거로써 쓰인다.

즉, 이민웅 교수는 철쇄 사용설을 일축한다. 또, 명량해전이 치러진 장소가 우수영 앞바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명량해전이 치러진 장소가 우수영 앞바다라는 이민웅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이순신역사연구회는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하여, 명량해전이 정설대로 울돌목에서 치러졌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그러한 이순신역사연구회의 반론을 보여주는 책 《이순신과 임진왜란4》의 한 부분이다.[8]

우선 우수영 앞바다는 조류의 흐름과 무관하며 바다는 호수같이 잔잔하다. 때문에 조류의 방향이 바뀌어도 왜군들은 물러가지 않고 조선 함대가 궤멸될 때까지 계속 공격해 올 것이다. 또 <지도 5-1-2>(옮긴이 주 : 우수영 앞바다에서의 전투모습)와 같은 진법으로 대치하고 있었다면 마다시의 죽음과 관계없이 도도 다카도라, 구키 요시다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선단들도 총력 공세를 폈을 것인바, 왜군들은 칠천량에서 조선 함대를 전멸시켰듯이 13척의 이순신 함대를 전멸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진도대교 아래에서 마다시를 죽였고 마다시 선단을 대신해서 공격을 시도코자 했던 도도 다카도라 등 뒤따르고 있던 왜선단은 패전한 마다시의 선단이 불이 붙은 채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떠내려 오고 있었기에 공격에 나설 수 없었다. 그 위에 역류가 된 물살은 더욱 급류로 변해 갔기에 이순신 함대에 접근해 간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렇게 정리해 볼 때 필자들은 <지도5-1-2>에 동의할 수가 없다.


영화가 최대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서 만들어졌나 살펴봤다.


https://mirror.enha.kr/wiki/%EB%AA%85%EB%9F%89/%EA%B3%A0%EC%A6%9D%EA%B4%80%EB%A0%A8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 있지도 않은 백병전이 오히려 비장미를 감소시켰다는 주장마저 있다.


영웅 이순신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군부독재를 미화하기 위해 장군을 부각시키고 미화시켰던 역사적 왜곡이 일정하게 남아 있으나, 실제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선을 격파했다는 사실은 영국의 닐슨 제독이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위대한 승리다.


우리 역사임에도 어느 누구도 그날의 상세한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친일 사관에 물든 사학계의 무능이 오히려 빛난다.



이순신 장군의 삶은 그대로 한편의 드라마요 영화다.


늦깍이로 무과에 급제하고,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며 진급하고, 왜군을 격파하고도 모함을 당하고, 백의종군하고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적을 격파하고 장렬히 전사한다.


좀 더 면밀한 고증과 역사의 복원이 아쉽다.


명량에서 승리한 요인 중 가장 큰 것은 조선의 전함이 일본의 전함보다 크고 단단했기에 충각 전술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4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 일본이 함선 제조기술이 더 뛰어날것으로 생각됐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조선술과 화포술이 일본보다 더욱 뛰어났기에 바다에서는 결코 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는 화두다.


수없이 많은 적선에 둘러싸여서 홀로 고군분투했던 대장선의 상황은 실제 상황일 것이다.


물러나 있던 아군 11척은 대장선의 고군분투에 용기를 얻고 다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영화 명량이 명량해전만을 다루었으니, 한산도 해전이나 노량 해전 등을 계속해서 다룰 수 밖에 없으며, 속편까지 염두에 두고 기획된 것이므로 이후의 속편도 기대된다.


따라서 영화 명량만으로는 아쉬웠던 부분을 속편을 통해서 채워주길 기대한다.